오녀산성에서
오녀산성(五女山城) 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은 중화인민공화국 요녕성(遼寧省) 본계시(本溪市) 환인현(桓仁縣) 오녀산(五女山)에 위치한 산성(山城)이다. 해발 800미터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쌓아 고구려 특유의 축성 양식을 보여준다. 오녀산성은 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테뫼식으로 만든 테뫼식 산성이다.
오늘날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처음 언급되었다.
고구려인이 만든 『광개토왕릉비』에는 홀본성(忽本城)이라고 하고 있고, 삼국 시대에는 환도성(丸都城), 졸본성(卒本城)으로 불렸으며, 《고려사》 공민왕조에는 오로산성(五老山城) 또는 우라산성(于羅山城)이라고 나타나 있다.
오녀산성은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으로, 남북 길이 1500m, 동서 너비 300m이고, 전체 약 8km이다.
성 안에는 천지(天池)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는데, 2천 년 동안 한 번도 마른 일이 없다고 하며, 깨끗하여 음료수로도 사용할 수 있다.
산성은 200m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어, 천연의 요새가 되어 왔다. 동쪽과 남쪽의 경사가 완만한 곳에는 성벽을 설치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전에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다.
환도산성
환도산성은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2.5km 지점에 위치하며 해발 676m 인 산성자산에 의지하여 쌓은 삼태기 모양의 성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6951m 이다. 성벽은 잘 다듬은 쐐기 모양의 성돌을 사용하여 5m 정도 높이로 정교하게 쌓았으며, 남문지구간과 서문등 문지가 있는 곳은 협축으로 그 외의 구간은 편축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위에는 1m 정도 높이의 평여장이 남아있으며 여장의 앞쪽에는 대략 1.5-2m 간격으로 주통(柱桶)이 구축되어 있다. 주통의 크기는 환도산성과 마찬가지로 가로 30cm, 세로 25cm 깊이 30-55cm 정도이다.
성문은 모두 7개인데 동쪽과 북쪽, 남쪽에 각각 2개씩 있고, 서쪽에 1개가 있다. 발굴조사 결과 남문은 서문과 같은 형태의 옹성문 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훼손상태가 심하여 정확한 구조를 알 수 는 없지만 성문 주변에서 많은 양의 기와가 출토되어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성내의 가장 저지대에 속하여 성벽에는 4개의 배수구가 구축되어 있다. 배수구 장방형으로 너비 0.8m, 높이 1.4m, 길이 13m 정도이며 입수구와 출수구의 레벨 차이가 크지 않아 바닥은 자연스럽게 경사면을 유지하도록 구축하였다.
남문지2호는 비교적 잔존상태가 양호한 옹성구조를 갖추고 있다. 문구부는 바닥에 쇄석이 깔린 개거식이며 너비는 5.4m 길이는 8.4m 정도이다. 옹성은 길이 19m 두께 3.7-6.5m 정도이며 긴 자루형태이다. 서문은 해발371m 서쪽성벽의 서남단에 위치하며 소봉의 정상부에 구축되어 있다. 성문은 개거식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너비는 3.6m 길이는 5.25m 이며 생토면을 다듬고 성벽을 구축하였으며, 개구부의 내외모서리 부분은 원형으로 처리하였다.
광개토대왕비
중국 집안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로, 호태왕비라고도 부른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다.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으로 비신의 높이는 5.34m, 각 면의 너비는 1.5m이다. 4면에는 총 1,802자의 비문이 적혀져 있다. 이 기록은 한국의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장수왕릉
장수왕은 고구려의 제20대 왕(재위 412-491)이다. 광개토왕의 아들이며, 408년 태자에 책봉되었다. 412년 즉위하여 중국의 진·송·위 등과 사신을 교환하여 국교를 맺었고, 427년 도읍을 평양으로 옮겨 남하정책에 착수하였다. 435년 위가 연을 멸망시키자 고구려에 피해 온 연의 왕 풍홍을 위의 요청으로 죽였다. 475년 승려 도림을 백제에 첩자로 보내어 국고와 백성의 힘을 소모시킨 후,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빼앗았으며 개로왕을 죽여 선대의 원한을 풀었다. 480년 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변을 쳐 고명성 등 7성을 점령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점점 확장되어 남쪽은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하에서 만주의 대부분을 포함한 큰 나라를 건설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종전의 부족제도를 지방제도로 고쳐 5부를 개설하는 등 민정에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재위 79년, 나이 99세로 고구려에서 가장 장수한 왕 중의 한 사람이다.
427년, 장수왕은 내부적으로 왕권의 위상을 높여서 국내성의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외부적으로 남진정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장수왕이 즉위할 무렵 중국 대륙의 북방에서는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북위가 세력을 팽창하며 신진 세력으로 등장한 북연을 압박하고 있었다. 북연은 이때 초대 왕인 고운이 부하에게 살해되고, 풍발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스스로를 대왕으로 높이고 세력을 확대했다. 이 바람에 북위와 잦은 충돌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북방이 이렇게 변화를 겪고 있는 동안 남방에서는 동진이 남연을 병합하고 오랫동안 지속되던 농민 봉기를 종결시켰으며, 서방에서는 서진이 남량을 압박하여 정복을 눈앞에 두었다.
이처럼 국제 정세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가운데 장수왕은 외교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우선 강남의 맹주인 동진과 화친을 맺고 북연을 견제하였다.
장수왕은 491년 음력 12월, 98살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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